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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세이

걸어야 보이는 것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계절이 바뀌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왔다고 쑥쑥 고개를 내밀던 개나리, 분홍색으로 물들었던 철쭉들이 자취를 감추고 담장 너머 고개를 내밀던 장미가 작은 폭죽 터지듯 만발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 며칠은 보라색 붓꽃이 고개를 숙이고 한들한들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시간 따라 선명해지는 계절의 색깔에 겸손해지는 아침이다.

 

한들 한들 흔들리는 코스모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봉오리를 터뜨리며 그 자태가 대단하던 꽃송이들. 지나가며 쓰다듬어 준 적도 없고 무럭무럭 자라라고 물 한 방울 준 적도 없는데  소리도 없이 티도 내지 않고  부지런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던가 보다. 아무것도 도와준  것이 없는데...

나만 혼자 바쁘다고 앞만 보고 달려갈 때 보이지 않던 것들. 문을 닫고 귀까지 잠가버려 들리지 않던 것들.  
- 계절이 바뀌고 있다고 알려 주는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  계절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왔다고 알리듯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송이들. 조금만 천천히 걸으면 이 모든 것이 한눈에  한 귀에 들어온다

내가 사는 곳에는 5일장이 있다. 시골 골목을 지나 시끌벅적한 시장통으로 들어가면 촌스러운 간판의 색깔과 상호명들이 보이고 그 끝자락쯤 시골장이 시작된다. 

 

꽈배기 먹는 여자아이

 

기름 짜는 고소한 냄새와 고추 빻는 방앗간의 매운 소리가 들리고, 생선파는 좌판 위엔 꿈틀꿈틀 움직이는 낙지와 입 벌리고 있는 가리비가 보인다. 다양한 먹거리와 제철 야채들을 넋 놓고 따라가다 보면 이른 새벽 당신의 텃밭에서 뽑아낸 신선한 채소를 하나하나 손질하는 아낙네들 앞에 발걸음이 멈춘다. 조금이라도 팔아드리고 싶은 마음과 덤으로 그 마음을 알아주는 아낙네들.  그렇게 노점들 사이를 걸으면 시간을 잊곤 한다.

 

지나칠 수 없는 국밥집


주전부리도 빼놓을 수 없지. 갓 구운 달달한 내가 솔솔 나는 빵, 고소하고 영양가 만점의 깨강정, 설탕에 갓 버무린 꽈배기는 늘 인기가 많다. 흰밥 한 숟가락에 얹어먹고 싶은 매콤 짭짤한 장아찌,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어서 와서 한 그릇 먹어보라고 손짓하는 국밥집도 그냥 지나치기는 섭섭하지.

색 바랜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어릴 적 향수에 퐁당 빠질 수 있는 곳, 엄마손을 잡고 걷던 그 골목을  이제는 딸과 함께 걷는 아빠와 엄마들의 모습마저 정겨운 곳-바로 전통 시장이다.

여고시절 국어 선생님이 우울하거나 힘들 때, 꼭 걸어본다는 곳이 바로 전통 시장이었다. 고등학생인 내게는 그저 선생님의 낭만적인 스토리쯤으로 여겨졌던 곳이었는데 내가 선생님 나이가 되어보니 실감 나는 삶의 현장이 되어있는 묘한 느낌이다. 

 

추억 속의 골목길



운동은 필수라고 매일 틈을 내서 운동 머신 위에서 땀내며 걷는 시간도 필요하다. 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늦은 저녁 부부끼리 손 잡고 산책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주말이면 앞 산이나 뒷 산으로 등산화 신고 천천히 걷는 시간도 필요하다. 


걷는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안다면, 기꺼이 자신에게 내어주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복잡하고 엉켜있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신선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푸릇푸릇해진 식물들을 바라보며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까닭이다.

어느덧 가을이 시작되는가? 유독 비가 많이 내렸던 올해 여름도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높은 하늘과 마주하는 가을 준비를 재촉한다. 촉촉한 흙길을 걷는 것도 좋고, 사람 바글거리는 전통시장을 걷는 것도 좋으리라.

 

천천히 걷다 보면 내가 마주한 것들이 점점 크게 보이고, 지나간 시간들이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음의 평화 같은 여유로움이 스며든다. 가끔씩이라도 천천히 걸어보는 건 어떨까? 지나치기 아까운 소중한 것들이 작은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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