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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세이

우리 집엔 슈퍼맨이 살고 있다

어디선가 본 광고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슈퍼맨 망토를 맨 어린 꼬마가 등장해서 -"우리 아빠는 지구를 지켜요” , “미세먼지를 엄청 줄이고 나쁜 연기도 없애서 공기를 맑게 해 준대요” "소나무를 많이 심어서 지구를 시원하게 해 주고요, 북극곰을 살려준대요"- 이게 뭔 소리야? 호기심이 극으로 발동해서 화면을 보니 슈퍼맨 아빠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지구를 살리고 있다. 
알고 보니 보일러 광고였지만, 식물이 주는 이미지와 어쩜 이리도 닳았을까? 지구를 지키는 건 정작 식물들이 아니던가? 말 대로라면 우리 집엔 슈퍼맨이 꽤 많이 살고 있다. 고무나무, 산세베리아, 관음죽, 스파티필름... 우리 집 슈퍼맨을 소개한다.

 

식물 인테리어로 완성된 거실


첫 번째 우리 집 슈퍼맨은 동글동글한 잎사귀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고무나무다. 가끔 맥주를 마실 때 조금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서 헝겊에 적셔 잎을 닦아준다. 벌레들이 미끄러질 만큼 윤기가 반질반질해진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내 집을 마련하고 집에 들였던 효자라고 할까? 햇볕 좋은 곳에 두었더니 쭉쭉 자라 줄기를 잘라 주었더니 두 줄기 가득 잎이 무성해졌다. 키만 큰 나무가 되어갈까 봐 잔가지를 잘라 물에 담가 두었더니 뿌리가 생겼다. 이런 신기할 데가 있나? 그렇게 장성해서 이젠 두 그루의 나무가 되었으니 내겐 더할 나위 없는 효자인 셈이다.


두 번째 우리 집 슈퍼맨은 뾰족뾰족한 잎들이 하늘을 뚫을 것 같은 산세베리아다. 물을 자주 안 주는데도 끄떡없는 게 굳세어라 금순이라고 불러야 할까? 산세베리아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위로만 자라길래 기둥을 세워 넘어지지 않게 보강해 줬더니 옆으로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폼이 멋스러운 녀석이 되었다. 언니에게 분양하고 난 후 아쉬워서 모종을 새로 들였는데 이 녀석은 옆으로만 자란다. 폭이 넓은 집에 분갈이해 주니 계속 새끼를 치며 번식하는 녀석이다. 


세 번째 우리 집 슈퍼맨은 병 앓이 한 번도 없이 꿋꿋하게 잘 자라는 관음죽이다. 십 년을 넘게 무병장수해 온 우리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슈퍼맨 아저씨. 어느덧 방안 한 구석을 늠름하게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식물들은 조금만 과습해도 무름병이 생기거나 벌레가 꼬이는데, 관음죽은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여태 정정하다. 아주 기특한 녀석이다. 


네 번째 우리 집 슈퍼맨은 하얗게 우아한 꽃을 피우는 스파티필름이다. 잎은 잎대로 꽃은 꽃대로 자태가 아름다운 이쁜이. 발레리나의 몸짓처럼 선이 곱고, 야리야리하면서 제법 강단도 있다. 흙도 물도 좋아해서 까다롭지 않고 관상용으로 보기 좋은 나의 네 번째 자식 같은 녀석이다. 


다섯 번째 우리 집 슈퍼맨은 넓은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콩고다. 아들과 딸 같은 자식을 주렁주렁 낳는 번식력이 강한 콩고. 동대문 원예 시장에서 식물 구경으로 신이 나 있을 때 상점 주인장이 추천해 준 녀석이다. 토양에 콜라를 부어주면 좋다는 얘기를 듣고 먹다 남은 콜라를 물 대신 주었다가 난리가 나서 얼마 안 돼 죽겠다 싶었는데, 분갈이 후에 더 튼튼해져서 아직도 내 곁에 남아 있다.


아직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블루베리가 여섯 번째 우리 집 슈퍼맨이다. 암수가 있어서 다른 종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한 그루만 키우고 있어 제일 미안한 블루베리 아가씨. 아픈 손가락 같은 녀석이다. 무슨 욕심인지 아파트에서 열매를 따 먹고 싶다고 들여놓은 블루베리.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면 제대로 땅에 심어주고 제 짝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녀석이다.


옹기종기 앙증맞은 다육이들은 손가락만 한 엄지공주 같은 귀염둥이들이다. 핑크 프리티, 라울이, 청옥이, 홍옥이... 생명력 강한 아이들이 약방에 감초처럼 자기 자리를 잘 지켜내고 있다.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던 적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는 레몬 나무도 있어서 레몬이라는 과일이 나무에서 자라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키워보지 않으면 땅속에서 자라는 열매인지, 나무에서 따 먹는 열매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던 나이라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아직도 조그만 화분에 고추도 심고, 좁은 거실 한편에 있는 식물들은 식물 집사인 엄마의 손길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우리 집 슈퍼맨을 보면서, 생긴 건 아빠를 닳았는데 하는 짓은 엄마를 닳았다고 언니들이 중얼중얼한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음식을 할 때나 식물들을 바라볼 때 나도 모르게 닮아 가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까.


콘크리트 덩어리 안에서 살아가면서 자연이 더욱 그리워지는 가을이다. 산과 들이 울긋불긋해질 무렵이면 우리 집 녀석들은 한여름의 더위를 잊고 다시 꽃을 피우고 새잎을 돋아내며 계절이 바뀌는 걸 제일 먼저 알려 준다.

 
주인장이 아프면 녀석들도 시름시름 기운이 없고, 기운을 내서 벌떡 일어나 살펴 가며 물을 주고 햇볕이 잘 드는 자리로 옮겨주고 떨어진 잎들을 치워주면 바로 싱싱한 초록색 기운을 뿜어내며 무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내가 지켜주는 것이 아닌 나를 일으키는 우리 집 슈퍼맨들이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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