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잡채는 잔치 음식이 아니다. 냉장고에 있는 야채들과 당면만 잘 삶아서 함께 볶아주면 되니까. 면류를 좋아하는 딸랑구는 국수를 해주면 늘 곱빼기를 해 줘야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닭볶음탕이나 감자탕에도 수제비나 당면, 우동 사리를 넣어 달라고 할 만큼 면순이다. 그래서 면순이를 위한 잡채는 필수요, 김밥은 선택이 되어 버렸다.
잡채의 재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재료가 야채이고 당면은 부재료이거늘 다 먹었다고 젓가락을 놓고 보면 당면은 깨끗이 사라지고 야채만 남는다. 남는 야채는 거의 내 몫이지만, 사실 야채야말로 영양덩어리 아니던가? 잡채를 만드는 재료를 미리 소분해서 김밥을 만들어 먹으면 딱 좋겠다 싶어 한꺼번에 만들어 두고 보니 이제 잡채를 만드는 날은 김밥도 먹는 날이다.
냉장고를 털어보니, 당근과 양파, 단무지, 부추가 나온다. 야채는 이 정도면 충분한데 뭔가 살짝 부족한 기분이 든다. 냉장고 구석탱이에서 어묵을 찾아내고 햄과 참치캔도 곁들여 내놓는다. 계란이 빠지면 섭섭하지... 전부 모아놓고 한눈에 펼쳐 보니 훌륭한 잡채와 김밥 재료가 준비됐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당면을 물에 불리는 일이다. 당면 한 주먹을 미지근한 물에 담가놓고, 냄비에 물을 끓인다. 야채들은 길쭉하게 같은 모양이 되도록 당근과 양파는 씻어서 모두 채썰기 하고, 어묵과 햄도 김밥에 넣을 것을 생각해서 가능한 가늘고 기다랗게 썬다.
물이 끓으면 부추를 살짝 데쳐서 소금, 마늘,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치고,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계란 먼저 지단으로 부쳐낸다. 양파와 당근은 소금을 살짝 뿌리면서 볶고, 햄은 그대로, 어묵은 간장을 한 숟가락을 추가해서 볶는다. 지단으로 부쳐낸 계란과 단무지를 채썰기 하면 밑 작업은 끝.
끓인 물에 부드러워진 당면을 삶을 때는 간장 한 숟가락과 올리브유 한 숟가락을 넣어 면이 붇지 않고 밑간이 되도록 한다. 잡채에서 당면의 밑간은 제일 중요한데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다. 이미 불려 놓은 당면이기 때문에 2분에서 3분 정도면 충분히 탱탱한 당면이 완성된다.
찬물에 헹군 당면을 간장 한 숟가락, 참기름 한 바퀴, 후춧가루, 굴 소스 한 숟가락, 설탕 한 숟가락을 넣고 프라이팬에서 센 불에 볶아준다. 이미 익혀 놓은 야채와 계란과 어묵, 햄을 넣고 당면과 섞어 한 번 더 볶아준 다음 통깨를 뿌리면 오색찬란한 잡채가 탄생한다.
무쳐둔 부추와 볶아둔 햄과 어묵, 당근과 계란은 단무지와 함께 김밥으로 보낼 준비를 한다. 따뜻한 밥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한 다음 주걱으로 자르듯이 섞어주고, 김 위에 살살 펼쳐서 깔아준다. 준비한 것 외에 기름기를 쏙 뺀 참치와 깻잎을 올려서 말아주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가 만든 김밥이 되시겠다. 뜨끈한 어묵탕이나 매콤한 떡볶이와 함께 먹어도 꿀맛이다.
만약에라도 김밥이 남았다면 냉장고에 일단 보관한다. 다음 날 뱃속이 궁해질 때 계란 물을 입혀서 전을 부치듯 김밥을 부쳐 내면 김밥전으로 둔갑한다. 그냥 먹어도 담백하니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고, 얼큰한 라면과 함께하면 금상첨화다.
잡채만 하기도 벅찬데 무슨 김밥까지 만들어 먹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재료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으니 이것보다 좋을 수 없다. 딸랑구에겐 필수 같은 잡채, 나에겐 선택 같은 김밥으로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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