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무슨 초콜릿 케이크냐고 촌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생일잔치상에서 빠지기 섭섭한 건 당연히 케이크가 아닐까? 딸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생일상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딸로 자랐다. 내 생일만큼은 조기를 굽고, 소고기를 볶고, 잡채에 각종 반찬들로 가득 채워진 밥상을 선물처럼 받았다. 생일상 한가운데에는 촛불밝인 초콜릿 케이크가 늘 있었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엄마의 정성인 것이다.
해가 바뀌기 전에 다음 연도의 달력을 미리 준비하면서 중요한 일정들과 생일을 표시해뒀는데, 깜박할 때가 있다. 지나치기 쉬운 생일을 기억하고,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본다. 이제 마트에 갈 때마다 생일 케이크를 떠올리며 재료들을 하나하나 사 두고, 어떤 장식을 해 볼지 상상해본다. 초콜릿 케이크와 과일장식도 어울리겠지만, 이번엔 심플하게 만들어본다. 내일은 우리 집 딸랑구의 생일이다.
케이크의 생명은 뭐니 뭐니 해도 촉촉한 스펀지케이크 아닐까? 처음 집에서 만들 때 실패를 하고 나서 엄두가 나지 않아 베이커리에서 사 먹는 걸로 만족했었는데 다시 한번 도전해 본다. 너무 단단하지 않고, 떡 같지 않은 상태로 폭신폭신한 스펀지케이크를 만들어봐야지.
계란과 버터를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놓고, 가루류와 액체류를 계량한다. 핸드믹서를 구입했으니 이번엔 머랭도 직접 만들어 본다. 계란을 흰자와 노른자로 나누어 놓고, 노른자와 설탕, 소금, 꿀을 섞는다. 코코아 가루는 체 쳐서 따뜻한 우유에 넣고 또 한 번 체에 걸러 고운 상태로 만들어준다. 박력분도 체 쳐서 함께 섞어준 다음 녹인 버터를 준비한다. 설탕이 잘 녹지 않아 손에 만져진다. 온도가 낮은 듯하여 따뜻한 물을 받쳐가며 믹싱 해보니 한결 수월하다.
드디어 머랭 만들기. 흰자와 설탕을 준비하고 핸드믹서를 고속으로 돌려본다. 거품이 뽀글거리면서 천천히 색이 변하고, 설탕을 나누어 다시 한번 넣으면서 믹싱. 단단한 머랭이 되면 완성이다.
이번에 머랭까지 넣어서 반죽하니 조금 기대가 된다. 머랭과 반죽을 함께 주걱으로 섞어준 다음 유산지를 깔아놓은 원형틀에 붓고 땅땅 테이블에 쳐서 기포를 빼준다. 예열된 오븐에 넣고 170도에서 30분 굽기. 달달한 냄새가 진동한다.
다크 초콜릿을 중탕으로 녹이고, 생크림을 휘핑한다. 생크림에 넣은 설탕이 안 녹을까 봐 온도를 높여준 게 실수다. 도대체 크림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크림통의 안내서를 보니, 차가운 상태에서 휘핑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부랴부랴 냉장고에 넣고 한 시간쯤 후에 다시 휘핑을 하니, 거짓말같이 빵빵하게 부풀어올라 크림이 되어간다.
녹인 초콜릿에 뜨거운 생크림을 넣어 섞어서 식힌 다음, 휘핑된 크림과 합체한다. 맛있는 초코크림이 완성된다. 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먹어보니 너무 맛있다. 웃음이 절로 난다.
오븐에서 꺼낸 시트도 생각보다 잘 나왔고, 설탕과 물을 끓여 시럽을 만들어둔다. 시트가 식은 다음 가로로 자르고, 시럽을 바른 다음 초코크림을 얹는다. 장식은 슈가파우더를 뿌리고, 레인보우 스프링클을 던지듯 붙여서 가장자리를 마감한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일 생일상에 올릴 생각에 조금 설렌다. 미역국과 잡채는 내일로 미루고 이렇게 생일이 다가오면 초콜릿 케이크를 굽는다.
생일잔치상에 어울리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잡채와 미역국은 기본이고, 불고기나 갈비, 문어숙회가 아니면 새우튀김.... 평소에 손이 많이 가서 만들지 않았던 음식들을 떠올려 본다. 오랜만에 외식을 해도 좋겠지만, 집에 돌아올 땐 손에 들려있는 케이크 상자를 빼놓을 수가 없다.
20대의 생일날과 지금이 같을 수는 없다. 뻑적지근하고 요란하게 보냈던 시절의 생일이 추억처럼 지나간다. 깜박 잊어버렸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지만 약간의 섭섭함이 남을 정도로 바뀌어 간다. 그래도 가족이 준비한 초콜릿 케이크 하나면 괜히 웃음이 나올 정도로 섭섭함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초콜릿 케이크 하나가 뭐라고.... 아니다. 초콜릿 케이크는 생일잔치상의 해결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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